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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사 4인의 사색의론(四色醫論)] 잘못된 의학지식, 비극의 시작
글쓴이 : 메디클럽 날짜 : 2013-05-14 (화) 09:55 조회 : 970


[이은신 세브란스유바외과 과장]

27세, 하얀 피부, 긴 생머리의 예쁘고 얌전한 그녀…, 너무나 선하고 밝은 미소…. 병실에서 환자복을 입은 그녀의 첫 인상이었다. 그녀는 만성 신부전으로 신장투석을 받는데 최근 갑자기 원인 모를 경련을 해서 의료진과 보호자가 초긴장상태다. 그녀 옆엔 그녀와 눈으로 대화하며 딸을 향해 밝게 웃어주고, 뒤돌아서 안타까움의 눈물을 삼키는 아버지가 항상 함께 있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원인 불명의 급성 신장염을 앓았다. '콩팥이 안 좋아서 고생을 한다'는 얘기에 주위에서 죽염이 좋다고 추천해서 열심히 먹였다. 불행은 거기부터 시작이었을까, 신장기능이 나쁠 때 염료나 짠 음식은 최악이다. 철저히 저염식을 해야 하고 저염식을 해도 신장병이 좋아질지 의문인데 반대로 소금을 열심히 먹었으니 신장은 회생불능이 되었고 신부전 진단을 받았다. 수년간 투석을 하다 신장 이식을 했다. 이식 후엔 장기간 면역 억제제를 복용해야 하는데 그 기간 동안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다른 환자로부터 결핵이 감염되었다. 활동성 결핵 환자인 것이 밝혀진 후엔 이미 늦었다. 이식은 실패했고 면역력을 완전히 상실한 그녀는 결핵균 감염으로 생사를 오갔다. 결핵 약을 최대한 강하게 써서 다행히 결핵에서 회복됐다. 그런데 그 때부터 점점 귀가 안 들리기 시작했다. 결핵약 중에 낮은 빈도지만 청력에 문제를 주는, 난청이라는 부작용을 일으키는 성분이 있다. 결국 그녀는 청력을 잃었다.

비극 영화에나 나올 법한 스토리인데 내가 갓 의사 생활을 시작한 인턴 시절에 만난 환자의 이야기다. 회진 때마다 담당 선생님의 질문에 청력을 잃은 그녀는 더듬거리는 말로 힘들게 밝은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주 3회 투석을 하고, 경련으로 언제 응급상황이 될 지 모르며, 투석관을 재수술하고, 심장 기능, 간 기능이 다 좋지 않았던 그녀. 사람들의 입모양을 열심히 보며 대답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안타까운 시선을 잊을 수가 없다. 간단한 소독 처치를 하는 게 내 일의 다였지만 그들의 안타깝고, 일면 아름다운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선 병실에 가기 전 혼자 한참 눈물을 쏟아야 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신장병, 뒤이어 일어난 악몽 같은 일들의 연속…. 설상가상 청력까지 잃게 만든 결핵균과 병원에의 원망. 가끔 지나가는 말로 얘기하셨지만 아버지는 죽염을 먹여 아이의 건강을 망쳤다는 엄청난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늘 슬퍼하셨다. 그리고 지극정성으로 그녀를 위해 병원에서 뛰어다녔다. 하지만 그들은 늘 밝았다. 애절한 부녀의 눈빛을 볼 때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을 때마다, 장기간 아픈 데도 전혀 신경질적이거나 좌절하지 않던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아버지와 의료진 앞에서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나도 선한 천사 같은 그 눈과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리 주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지식으로 건강을 해치고 있는지 모른다. 위의 일은 극단적인 사례지만 실제 의료의 현장에는 짧은 지식이나 소문만으로 비과학적인, 치료 아닌 치료를 받아 건강을 해쳐서 오는 환자들이 부지기수다. 그들을 계몽하고 잘 안내하는 것도 의료계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책임감을 통탄한다. 순간의 잘못된 판단과 정보로 소중한 이의 건강을 잃게 하는 일에 대한 대책이 필요할 것이다.

이후에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방법이 없다. 어디에선가 그녀가 건강한 몸으로 아버지와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떠올려본다.


2012. 06. 12 국제신문 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