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찬영 동의대한방병원 화병스트레스센터 교수
70세 여성 환자 C 씨는 설 명절 이후 심해진 가슴 답답함과 불면증을 호소하며 내원했다. “밤새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온몸에서 열이 나는데, 잠은 오질 않아 너무 힘들어요.” 평소 건강하던 그였지만, 최근 목에 무언가 걸린 듯한 답답함과 두통, 어지럼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C 씨는 이번 설에 오랜만에 모인 가족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고 했다. 둘째 아들에게 최근 진단받은 질병 소식을 전해 들었고, 며느리의 건강도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주들은 입시와 취업 스트레스로 힘들어했다. “내가 더는 아이들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요. 하지만 이런 말을 가족에게 하면 더 걱정할까봐 차마 하지 못하겠어요.” C 씨는 명절 내내 웃는 얼굴로 가족들을 대했지만, 속으로는 그들의 걱정거리를 혼자 삭이고 있었다.
C 씨는 설 명절이 끝난 후 일주일간 여러 병원을 찾아 다녔다. 심장내과, 소화기내과 등 가능한 검사는 다 해보았지만,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증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필자의 화병&스트레스센터에 내원한 C 씨를 진찰한 결과, 전형적인 화병(火病)이었다. 화병은 한의학에서 오래전부터 치료해 온 질환으로, 억눌린 감정이 신체 증상으로 표출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요즘 노년기 화병 환자들을 진료하다 보면, 가족에 대한 걱정과 무력감이 주된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C 씨의 경우, 가족의 건강 문제를 알게 되었으나 이를 표현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컸다. “내가 늙어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자책감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평생 가족을 돌보는 것이 삶의 중심이었던 그에게 이러한 무력감은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C 씨에게는 억울하고 답답한 감정을 풀어주는 가미소요산(加味逍遙散)을 처방했다. 가미소요산은 노년기 화병에 자주 사용하는 처방으로, 특히 가슴 답답함과 열감이 있으면서 불면 증상이 동반될 때 효과적이다. 또 침치료를 주 2회 시행했으며, 가정에서도 매일 저녁 족욕을 하면서 깊은 호흡과 함께하는 이완요법을 권했다.
더불어 화병&스트레스센터에서 운영하는 주 2회 집단 마음챙김 명상 프로그램 참여를 권했다. 이 프로그램은 비슷한 연령대의 환자들이 모여 함께 명상하고 경험을 나누는 시간으로, 자신만 이러한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C 씨였지만,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명상하는 방법을 배우고 나니, 밤에 걱정되는 마음이 들 때 스스로 달래줄 수 있게 되었어요.”
C 씨의 화병은 단순한 스트레스성 질환이 아니었다. 그에게 화병은 평생 동안 가족을 위해 살아온 부모 세대가 겪는 감정 표현의 문제였다. 특히 명절은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쁨도 있지만, 각자의 어려움을 마주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감정을 억누르거나 혼자 삭이지 않는 것이다. 가족과의 솔직한 대화, 같은 경험을 가진 이들과의 교류, 그리고 전문적인 치료를 통해 건강한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