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다른 이유도 없이 온몸이 쑤시고 가슴이 화닥거리며 목과 어깨 위로 열이 치밀어 오르는 경험을 말하는 이가 더러 있다. 오래된 일이 뜬금없이 떠올라 울컥 눈물이 나고, 참아왔던 화가 갑자기 치솟아 견디기 어렵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이러한 증상이 반복된다면 단순한 스트레스가 아니라 화병을 의심해야 한다.
화병은 오랫동안 억눌린 울분과 감정의 부조화가 축적된 끝에 몸과 마음이 더는 감당하지 못하고 폭발하며 나타나는 질환이다. 시집살이의 고됨, 결혼생활의 갈등, 경제적 긴장, 직장 내의 만성적 스트레스, 가족 관계에서 오는 깊은 상처 등 다양한 원인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겹겹이 쌓이면서 형성되는 예가 많다. ‘동의보감’에 보면 기가 맺히고 풀리지 못하면 울이 된다고 했으며, 오래된 울체가 결국, 화로 변한다고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이는 감정의 억압이 시간이 지나면서 열적 반응, 즉 화병으로 변질되는 기전을 정확히 짚고 있다.
화병의 증상은 신체적 영역과 정신적 영역으로 나뉘어 나타난다. 신체적으로는 가슴이 답답하고 목 위로 열이 오르며 눈이 침침하거나 귀가 먹먹해지는 증상을 흔히 경험한다. 두통 불면 체기 소화불량을 동반하며, 사지의 기운이 빠지고 목·어깨가 굳어 심한 견비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정신적으로는 감정 조절이 어려워지고 기복이 심해지며, 판단력이 흐려지고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쉽게 화를 내거나 폭발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유 없이 우울하거나 허탈함에 빠지고,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않으며, 반복되는 부정적 사고와 자기 비난에 사로잡히기 쉽다. 이런 증상이 심화하면 피해망상이나 공격적인 행동으로 진행하기도 한다.
한의학적으로 화병을 치료할 때에는 침 뜸 약침 탕약을 활용해 기의 울체를 풀고 심신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 초점을 둔다. 침 치료는 막힌 기를 소통시키고 과도하게 치밀어 오른 열을 가라앉히며 가슴 답답함과 목의 갑갑함, 두통과 불면 증상을 완화하는 데 효과적이다. 뜸 치료는 순환을 개선하고 체력을 보하며, 몸의 허약함을 보완하는 데 유용하다. 약침 치료는 병소나 경락에 약물을 직접 주입해 기혈 순환을 빠르게 회복시키고 상열감을 안정시켜준다. 탕약은 화병 치료의 핵심으로, 기울을 풀고 심화(心火)를 내리며 허약해진 기혈을 보하는 방향으로 처방된다. 공진단은 장기간의 스트레스와 감정 소모로 정신력과 기력이 저하된 경우에 뛰어난 효과를 보이는 약으로, 심신의 균형을 동시에 돌려 세워 화병으로 말미암은 공허감, 피로감, 정신적 소진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
화병을 지닌 이들은 종종 자신이 화병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모든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더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화병은 의지나 인내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더 깊고 풀기 어려운 상태로 진행할 수 있다. 작은 신호일 때 전문가의 진단과 치료를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이다. 가슴이 막힌 듯 답답하고 이유 없는 분노나 눈물이 반복되는 시점이 바로 치료가 필요한 때이다.
이유림 광도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