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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유병 장수' 시대, 의료복지의 허실
글쓴이 : 메디클럽 날짜 : 2013-10-21 (월) 09:28 조회 : 898


[황성환 안락항운병원장]
 
- 4대 중증질환 보장, 보편적 복지 위해 과도한 재정 투입…치밀한 검토 필요
 
얼마 전 대장암 환자인 92세 할아버지를 우리 병원에서 성공적으로 수술하게 된 것은 외과의사로서 큰 기쁨과 자긍심을 갖는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보청기를 낀 귀에 가까이 대고 큰 소리로 말을 해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연세의 암 환자를 응급으로 수술한다는 것은 외과전문병원이라고 해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대학병원으로 옮기는 것도 고민하다가 수술 전 검사 소견과 전신 상태가 대수술을 감당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고, 보호자들과 공감도 이뤄져 용기를 내게 된 것이다. 고령에 대한 부담으로 긴장감이 높았으나, 필자에게 생명을 구할 중책을 맡긴 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수술칼을 댔다. 다행히 팀원들의 긴밀한 협조로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암 주변 조직은 물론 우측 대장과 소장의 일부까지 확대 절제하는 상당히 큰 수술이었다. 힘든 수술을 견디고 다음 날 엷은 미소를 띤 어르신을 보면서 정말 감사할 따름이었다.

'유병 장수'시대다. 검진 기능이 향상되고 노인들을 대상으로 포기하지 않는 활발한 의료 행위로 인해 질병을 가진 상태에서 장수하는 어르신들이 많아졌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는 만큼 건강도 향상되면 좋겠으나 현실은 다르다. 과거보다 나아진 형편 탓에 돈 걱정 없이 병치레를 하는 어르신들은 다행이다. 하지만 단돈 몇 만 원이 없어 병원 문턱도 넘지 못하는 노인들이 꽤 많다. 눈물을 글썽이며 들어야 할 기구한 사연을 가진 환자도 간혹 본다.

정부가 얼마 전 암·뇌혈관·심장·희귀 질환 등 '4대 중증 질환 보장 강화 계획'을 발표했다. 4대 중증 질환 진료비 가운데 그동안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했던 고가 항암제 등을 오는 2016년까지 단계적으로 건강보험에 적용해 환자 부담을 덜어주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건강보험을 확대 적용해 1인당 진료비 부담액을 평균 43%가량 줄이겠다는 목표이다. 이를 위해 복지부는 4대 중증 질환 진료 실태를 조사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던 비(非)급여 항목을 필수, 선택, 비급여로 나눴다. 이중 필수 급여 항목을 늘려 환자가 진료비의 5~10%만 부담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2017년까지 약 9조 원이라는 막대한 추가 재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수명연장 시대 가야 할 길이긴 하나, 재정 부담이 워낙 커 걱정이 앞선다. 대통령 공약에 따라 전시행정으로 급히 내놓은 계획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편으론 다른 중증 질환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안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항암제만 하더라도 100% 효과가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말기 암환자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불안한 심리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고가 약제의 과다 사용을 허용한다는 것은 건강보험 재정으로 다국적 기업의 배만 불리는 일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잖아도 천문학적 수익을 내는 다국적 기업이 책정한 약가는 과도한 측면이 있으나 정부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는 듯하다. 결국 의료보장 확대에 따른 부족한 재정과 팽창하는 복지 욕구를 감당하기 위해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국내 의약계에 대한 희생과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의약계 전반의 존립 기반이 항상 흔들리고 있는 근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암 환자는 이미 질병이 발견되는 시점에 국가로부터 약 5년간 다양한 혜택을 받고 있다. 각종 검사와 항암 치료 시 비용의 5%만 본인이 부담한다. 암으로 인한 장애 발생 때는 장애인으로 지정돼 도움을 받는다. 따라서 4대 중증 질환 보장 강화 계획은 중증질환에 국한되는 것이지, 암과 관련해서는 새로운 내용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우리 주위엔 홀로 투병하며 본인의 의지로 치료받지 못하는 홀몸노인이 상당하다.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청춘을 바쳐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으나 정작 쓸쓸히 어둠의 그늘에 있는 분들을 우리는 살펴야 한다. 연로한 노인들을 젊은 힘을 합쳐 모시는 사회. 또 그 젊은이들이 노인이 돼 후대로부터 도움을 받는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전통은 세계인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이에 부합하는 의료복지 정책을 펴되 이러쿵저러쿵 논란이 많은 보편적 복지를 위해 과도한 건강보험 재정을 투입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또한 치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한 번 시행하면 돌리기 어려운 것이 복지 정책이다.
 
 
2013. 09. 02 국제신문 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