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환 안락항운병원장]
- 환자의 말을 듣고 신체를 만져보고 따뜻한 말 건네는 것, 그것이 의술이다 -
해외 출장 갔다던 친구의 전화 목소리에 당혹감과 불안함이 깔려 있었다. 고객과 술을 진탕 마시고 아침에 일어나 변을 보고나니 항문이 따갑고 피가 나며 혹이 생겼단다. 안절부절못하는 친구를 안심시키고 휴대전화로 사진을 보내 달라고 해서 확인하니 급성 치질이 생긴 것이었다. 몇 가지 대처법을 설명하다 오죽 다급했으면 먼 이국땅에서 엉덩이 사진까지 찍어 보냈을까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요즘은 병원 홈페이지 상담실에도 스스럼없이 아픈 곳의 사진과 불편함을 적어 올린다. 성의껏 답변할라치면 꽤 시간도 걸리고 신경도 쓰인다. 하지만 상담실 답변만 믿고 엉뚱한 사고라도 생기진 않을까 걱정될 때도 있고, 어처구니없이 항의 전화라도 받으면 머리가 멍해진다. 확신이 서지 않아 "가까운 병원을 방문하시라"고 하면 프로슈머(prosumer)들은 온갖 험담을 늘어놓기도 한다. 이미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단순 원격진료의 좋고 나쁜 일례다.
미래창조과학부 등이 '유비쿼터스 헬스(U-health)'라는 신조어까지 동원해가며 모바일 통신기술을 접목한 원격진료를 미래 성장산업으로 법제화할 태세다. '휴대전화에 외장 측정기를 연결해 환자의 혈당, 산소 포화도 등 건강지표를 측정해 그 결과를 의사의 휴대전화나 의료기관 웹사이트를 통해 관리한다'는 것이다. 전송된 사진이나 데이터로 질환을 진단, 모니터링하고 처방을 내릴 수 있다는 얘기다. 일부 경제학자나 관련 기업은 원격진료야말로 의료시장의 혁신적 성장 동력이고 의사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목청을 높인다. 원격진료의 미래가치가 연간 수조 원에 달할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또한 진료비 절감, 환자 만족도 상승, 건강보험공단의 재정 건전성을 가져올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하지만 의사 입장에서 이런 얘기를 듣고 있자면 마음이 영 불편하다. 근거도 충분치 않은데 경제적 수익성을 잔뜩 부풀리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누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당신 나이 들어 은퇴하면 휴대전화 하나 들고 산속이나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라"고 고함치고 싶다.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멀리서 전송된 수치 결과만으로 환자의 상태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려 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면 의사의 의술이 마치 인터넷 쇼핑몰 판매행위처럼 되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의사들은 원격진료 체계의 법제화가 대형 병원으로의 쏠림현상을 가속화한다거나, 이로 인해 1차 의료기관들이 어려운 지경에 처해 결국 우리나라 의료체계가 붕괴될 수 있다는 주장도 편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가뜩이나 현행 의료체계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인데 원격진료까지 가세하면 누가 동네의 1차, 2차 의료기관을 찾으려 할 것인가. 그러나 더 염려스러운 것은 이런 식의 반대가 밥그릇 싸움에 목매는 '집단이기주의'로 몰릴까 하는 것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케케묵은 비아냥거림으로 돌아올까 걱정도 된다.
의사가 환자를 대면할 때의 '첫 느낌'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환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몸 상태를 살피려 신체 일부를 만지거나 두드리고, 눈 흰자위 색깔만으로도 위급함과 위중함, 어디가 얼마나 불편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의사의 섬세한 촉감은 정말 중요한 것이어서 이를 로봇이 결코 대신할 수는 없다. 때론 환자의 개인 사정이나 과거사가 질환 치료에 매우 도움이 된다. 환자의 얼굴을 직접 대하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의료 현장에서 검사 소견 및 데이터는 진단과 치료에 큰 도움을 주지만 수치화한 징후들이 건강상태를 항상, 매우, 잘 반영한다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인식이다.
다 제쳐두고 고혈압이나 당뇨를 앓는 홀몸 어르신들께 물어보라. 한두 달에 한 번 고작 5분 그 잘난 의사 얼굴 보기위해 목욕 화장하고, 고이 간직해 둔 장롱 속 옷 입고 병원을 찾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화려한 외출'을 알기나 하나? 혈압이나 혈당 측정하고 처방 약 받기 위해 병원 오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직장암 수술 후 장기 입원해 계신 한 노인의 말씀은 그래서 더 훈훈하다. "원장님 손이 약손입니다. 매일 만져주시니 어느 새 병이 다 낫는 것 같습니다." 환자는 의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사랑과 정성을 다한 마주침이나 스킨십에 감동한다. 이게 바로 의료 현장에서 마주치는 의사의 일상이며, 바로 의술(醫術)이다.
2013. 10. 16 국제신문 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