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운 부경대 교수·방사선의학전문대학원 추진 실무위원장
부산은 198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암 환자들에게 희망과 복음의 도시였다. 그 배경은 장기려 박사(1911~1995)였다. 의사가 된 이유를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라고 말한 그는 단순히 착한 의사여서 존경받는 것이 아니다. 장 박사는 간(肝)암은 수술하지 못한다는 관념을 깨고 암에 걸린 간의 부위만 대량으로 절제하는 ‘간대량 절제술’을 성공시킨 당대 최고의 의학자였다. 그런 그가 부산 송도의 복음병원에 있으면서 직접 수술을 하고 고신대 부산대 인제대에서 후진들을 양성했기에 부산은 한국동란 이후 40여 년간 우리나라 암 치료의 선도적 도시가 되었다.그러한 부산 의료의 자부심이 붕괴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부산에서 암이라고 진단받았는데 서울의 병원에 가보니 암이 아니라 하고, 암이 아닌 것으로 진단받은 환자가 미심쩍어 서울에서 한 번 더 검사하니 암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속출했다. 원인은 의사가 아니라 PET(양전자단층촬영술)라는 방사선 의료기기였다. 방사성 물질(동위원소)을 몸 안에 주사하면 성장력이 왕성한 암세포가 모조리 흡수한다. 이렇게 암세포에 스며든 방사선(감마선이나 베타선)을 측정해서 선명한 영상으로 만드는 것이 PET다. 우리나라에는 1990년대에 서울의 한국원자력의학원(원자력병원)과 삼성의료원 두 곳에서만 운영됐다. 2000년대 들어서자 수도권의 다른 병원들도 도입하기 시작해 20여 곳에서 운영되었다. 부산에는 그때까지 PET가 한 대도 없었으니 암 환자들의 탈부산, 수도권 집중이 이때부터 가속화되었다. PET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만드는 입자가속기(사이클로트론)가 필요하다. 현재 부산을 비롯해 전국의 큰 병원에 PET가 보급된 것은 한국원자력의학원에서 입자가속기를 국산화했기에 가능했다.정부가 의대 정원을 늘리는 배경으로 고령화를 꼽고 있다. 고령화에 수반되는 대표적 질병이 암이다. 국립암센터의 자료에는 우리 국민의 기대수명인 여든 두세 살까지 남성은 5명 중 2명, 여성은 6명 중 2명이 암에 걸린다고 했다. 암 치료의 3대 방법은 외과수술, 항암치료, 방사선치료이다. 노인들은 신체가 허약해 외과수술이 어렵고, 수술의사와 치료시설 마련에 엄청난 예산과 인력이 투입된다. 그래서 수술하지 않고 빛을 쪼여서 암세포를 없애는 방사선치료가 늘고 있다. 더 근본적인 것은 암을 조기에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이다. 즉, 의료의 패러다임이 환자 치료나 진단 중심에서 사전예측과 맞춤형 정밀의료로 전환되고 그 중심에 방사선 의학, 방사선 의료장비가 있다.수도권 대형병원에 밀리던 부산은 2000년대 들어 꿈의 암 치료기라는 중입자가속기와 암 치료의 거점센터인 동남권원자력의학원, 그리고 방사성 의약품을 생산하는 연구용원자로 등 세계적 수준의 방사선 치료, 개발 시설을 집중적으로 유치했다. 사업비만 1조4000억 원이다. 유치운동의 주역은 원전건설 때 경제적 보상은커녕 집과 논밭이 모두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세대주의 70%가 개발제한구역 훼손 전과자로 전락되었던 고리원전 인근 주민들이다. 그들은 고리1호기 수명연장과 신고리 원전 건설에 따른 보상금과 지원금 4000여억 원을 원자력의 비발전 분야인 방사선 의과학에 헌납해 우리나라와 부산 의료발전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했다.부경대는 의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임상의사가 아니라 미래 첨단의료에 대응하고 다양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의사과학자를 양성하는 방사선 의학전문대학원이다. 국내에는 10여 개의 첨단바이오단지가 있지만 병원과 첨단의료장비 및 시설을 두루 갖춘 곳은 없다. 첨단의료, 미래의료는 이러한 전문병원과 장비가 있어야 하는데 부산은 모두 갖추고 있다. 또한 교육과정에 국내외 방사성 비상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긴급의료 조치도 포함할 수 있다. 지역적으로는 해마다 전국 암 환자 사망률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부산을 보다 건강한 도시, 수도권에 대비되는 동남권 1000만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동시에 의료관광의 허브로도 만들 수 있다.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에 이러한 점이 반영되길 바란다. 손동운 부경대 교수·방사선의학전문대학원 추진 실무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