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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교육과 스승
글쓴이 : 메디클럽 날짜 : 2025-08-04 (월) 09:31 조회 : 18

이상찬 세화병원장


한 사회에서 교회가 건축될 때, 여기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목적을 지닌다. 누군가는 신의 뜻을 전하고 구원의 손길을 건네기 위한 공간이라 여겨, 사명감을 갖고 교회를 짓는다. 또 다른 이는 훌륭한 건축물을 남기고 경제적 이득을 기대하며 참여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단지 일당을 받고 벽돌을 쌓는 일 자체가 생계의 수단이기에 묵묵히 노동에 임할 뿐이다.

세상을 바꾸는 이는 언제나 소수이고, 대다수는 생존과 현실을 좇는다. 그렇다고 누구를 옳다 그르다 예기하고자 함은 아니다.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자연계 역시 강한 소수가 약한 다수를 지배하는 먹이사슬 구조 안에 있다. 최상위 포식자가 많아지면 생태계는 곧 붕괴되고 만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소수일 수밖에 없고, 균형은 그렇게 유지된다.

인간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극소수의 인재가 진화된 사회로 이끌고, 혁신적인 사고를 가진 한 사람이 수십만 명의 일자리를 만든다. 이러한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이 아니라, 자긍심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지혜를 전수하는 교육, 즉 스승의 역할이다.

영국이나 미국은 어릴 적부터 엘리트 교육 시스템 속에서 훌륭한 스승과 인연을 맺고, 뜻을 함께할 친구들과 미래를 설계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대학을 졸업한 지금의 80대 선배들은 미국유학을 위해 단돈 100달러를 손에 쥔 채 2주간 배를 타고 미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접시 닦기, 유리창 닦기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전자 조선 기계 철강 원자력 등의 학문을 배운 후 한국에 돌아왔고, 이 지식은 대한민국 산업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당시 선배들에게는 모교의 명예를 지키고자 후배를 질책하던 자긍심이 있었고, 중고등학교 선생님도 평생의 스승으로 기억되었다. 지식뿐만 아니라 지혜와 정신을 전수하는 교육이 살아 있는 시절이었다.

의과대학의 교육도 예외는 아니었다. 1970~80년대의 레지던트들은 도제식 교육을 받았으며, 지도교수님은 평생의 스승으로 존경받았다. 의학 지식이나 수술 기술은 말할 나위 없고 그분의 가치관과 철학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같은 전공의사라도 어느 교수님에게 배웠느냐에 따라 치료 방침과 판단이 달라질 수 있었다.

그 시절엔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한 달 연속당직을 섰으며, 환자 진료를 사명감으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AI시대를 맞이하면서 의학교육의 환경과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더구나 레지던트들이 줄줄이 사직하고, 의대생들마저 휴학하는 현실 속에서, 더 심각한 위기는 전문 지식의 단절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환자가 자신의 질환에 대해 의사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세상이다. 새로운 기술이나 치료법을 오히려 환자가 알려주기도 한다. 이번 의료 대란을 겪으며 우리는 단지 의학지식의 문제보다도 의사의 자긍심과 지혜를 전수해 줄 ‘스승’이 절실하다는 다소 꼰대같은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이런 스승이 되고 싶어도 되기 어려운 여건이 된 것, 이것이야말로 한국 의료계의 가장 큰 뼈아픈 손실이다.

인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영국과 미국처럼 어릴 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통해 훌륭한 스승을 만나고, 함께 성장할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 사회는 언제나 극소수의 인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엘리트가 조직을 이끌며 다수의 삶을 변화시킨다.

자연계에서 사자 같은 최상위 포식자는 소수일 수밖에 없으며 인간의 사회에서도 비슷하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균형 잡힌 질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