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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의료 경영인의 고민
글쓴이 : 메디클럽 날짜 : 2013-06-27 (목) 13:20 조회 : 692


[황성환 안락항운병원 병원장]
 
-생존 위기 의료계…의술과 인술이 아닌 경영 고민하는 것이 요즘 의사들 자화상-
 
해마다 이맘때면 그 어른이 생각난다. 고 장기려 박사. 결혼식 주례를 서주셨기 때문이다. 주례사로 선생님의 단골 주제인 '신(信) 망(望) 애(愛)', "서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사랑으로 살아가라"는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께선 현역 은퇴 후에도 부산의 여러 병원에 회진을 다니셨다. 당시 인제의대 백병원 전공의였던 필자는 일주일에 한 번 선생님께서 오시면 회진을 따라 돌기도 했다. 우연히 선생님께서 집도하신 수술을 관찰한 적이 있었는데 고희를 넘기셨는데도 정확하고 매서운 칼 솜씨에 놀랐다. 선생님의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특별했다. 짧은 대화에 감동받아 손을 맞잡고 우는 환자도 많았다. 수술비를 못 내는 가난한 환자에게 "밤에 뒷문을 열어놓겠다"며 병원에서 도망가는 길을 가르쳐 주신 일화는 유명하다. 무소유는 선생님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진지하고 열정적인 '의술', 박애와 사랑의 '인술', 그 둘을 융합해 '참의사'의 길을 가신 진정한 본보기로 그 어른을 기억한다.

대부분의 의사는 늘 '인술'에 목말라한다. 우리를 가르친 스승들이 '참의사'의 길을 가려 했던 것을 보았고, 또 그 길이 '진정 목숨 바쳐 가야 할 길'이라는 명제를 우리도 알기 때문이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는 '혁신가의 처방(Innovator's Prescription)'에서 '파괴적 의료 혁신사례'를 강조했다. 정부 입장에선 복지는 확대하되 공공의료비 지출은 줄여야 한다는 딜레마에 곧잘 빠진다. 국가 재정은 늘 제한적인데, 정치인들은 표를 위해 서민 의료 혜택을 더 늘리라고 정부를 압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딜레마를 풀 해법은 사실 별로 없다. 결국 '국가(甲)' 면허를 받아야 하는 '의료종사자(乙)'의 허리를 쥐어짜는 쪽으로 흐를 수밖에.

이런 상황에서 의료계는 '생존'을 위해 정부가 제시한 프레임 내에서 크고 작은 다툼을 벌이게 되고, 이는 의료계의 존립기반을 극한상태로 내몬다. 거기다 각종 편법까지 등장한다면 환자들을 위한 치료서비스의 질 또한 급격히 저하된다. 결국 이러한 의료 환경 아래서는 "기존 의료형태를 파괴, 해체하고 새로운 사업분야로 거듭 태어나는 혁신적 처방이 필요하다"는 게 바로 크리스텐슨 교수 주장의 핵심이다. 결국 의사들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인술'인가, '경영'인가.

병원은 과학적인 치료를 하는 의료 기관이자 연구기관이다. 또 전문 의료인을 양성하고 배출하는 교육기관이다. 게다가 고용을 창출하고, 지역경제의 한몫을 담당하는 주요 서비스산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상황에선 국민건강보험에서 제시하고 인정하는 프레임 내에서 질환 치료만 해서는 병원 경영의 효율은 분명 떨어지게 되어 있다. 사실 수지 균형도 맞추기 힘들어 고민하는 동료의사들이 많다. 의료비는 상승하는데 의료보험 수가는 최저수준, 아니 그 이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또 청구를 잘 못하면 부도덕한 의사로 몰리거나 과잉 진료의 덤터기로 과도한 징계적 손실을 요구받기도 한다.

그 속에서 초대형 병원들은 환자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커져만 간다. 의료계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의사 개인이 스스로 '가치제안(value proposition)'을 하고, 살아남기 위한 존속적 변화 또는 혁신을 이루어 내야만 한다. 누구는 전문화의 길로, 또 누구는 대형화의 길로 쫓기듯 내몰리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한창 전쟁의 승리를 구가하던 시절, 그는 또 다른 고민에 시달렸다. 기존 거점을 강화할 것인가, 아니면 정복지를 더 늘려갈 것인가. 그는 후자를 택했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지친 부하들로부터 신뢰를 잃기 시작했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열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대제국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지금 대한민국의 의사들은 '의술'과 '인술' 사이에서 고민할 여력이 없다. 오히려 '의술'과 '경영' 사이에서 서성이고 있을 뿐이다. 특히 전문병원을 운영하는 필자 같은 경우엔 번민이 더 많다. 전문병원으로서 한 우물만 팔 것인가, 아니면 종합병원으로 확장시킬 것인가. '8부 능선'을 넘었다는 의사들이 항상 고민하는 대목이다.
 
 
2013. 06. 24 국제신문 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