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환 부산항운병원 병원장]
할머니 한 분이 진료실에 들어왔다. 지난해 말 할아버지가 검진을 받던 중 직장암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당시 의사는 대학병원 수술을 권했으나 두 어르신은 비용을 댈 수 없어 치료를 포기하고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자 수소문 끝에 필자를 찾아왔다. 할머니는 집을 잡혀서라도 수술을 받으러 오겠다고 말했다. 이에 필자는 "돈 걱정은 하지 마시라"고 얘기하고 할아버지를 맡기로 했다.
이 같은 어르신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있다. 암은 환자에게 엄청난 고통이다. 치료비 또한 만만치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암환자들에게 산정특례를 적용해 본인부담금을 총진료비의 5%만 내도록 혜택을 주고 있다. 특히 우리 병원처럼 특진비가 없는 곳에서는 진찰, 수술, 마취, 입원, 기타 치료비 등을 다 합쳐도 환자의 총경비는 100만~150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 이는 상급종합병원의 15~20% 수준이다.
종합병원에서는 특진비와 인정 비급여 등으로 부족한 진료수입을 보충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매우 비합리적이다. 정작 환자부담 의료비의 많은 부분을 일회용 재료비가 차지한다. 이는 재사용이 불가하고 추가비용도 받을 수 없다. 또 의료진 3~4명의 수술비보다 기구값이 몇 배 비싸다. 이런 소모성 기기 사용은 건강보험 재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병원도 환자도 정부도 이득이 되지 않는 부담스러운 짐이다.
이런 현상을 볼 때 우리 의료정책이 글로벌 기업의 편에 있거나 이들의 로비에 끌려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글로벌 기업의 배를 불려주면서도 의료비 상승에는 무덤덤해 보여서다. 의료재정의 왜곡 분배이고 난맥상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비용 감소방안을 마련하고, 규제 완화로 국내 기업의 진입 장벽을 낮춤으로써 값 싸고 질 좋은 일회용 기기의 개발과 생산을 장려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요즘 병원들은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국가의료정책은 교육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상업적 논리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의료기관 경영 압박의 근본적 요인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면 좋겠다. 위축되는 병원들이 늘수록 의료의 공적인 역할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걱정도 해 본다.
의료분야가 선순환하려면 제대로 된 의료기술을 가진 인력이 계속 배출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예컨대 외과에서는 의학도 수가 자꾸 감소해 필수의료분야인 외과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고급 수술인력도 부족한 실정이다. 그리고 의료사각지대에서 생명을 위협받는 직장암 할아버지, 수술을 해도 국가로부터 받는 돈만으로는 유지하기 힘든 병원들, 그럼에도 쥐어짜기 방식의 의료정책, 그 틈새에서 배부른 기업들…. 많은 외과의사들이 수술을 그만두려는 이유는 힘들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수술한 환자들을 평생 책임져 드리기에는 의료환경이 녹록지 않아서다.
의사는 환자들로부터 듣는 칭찬과 사랑, 존경의 표현에 힘을 낸다. 그러나 생존에 급급한 현실에서 존경받는 의료인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딱한 처지의 노인 한 분이야 어떻게든 책임질 수 있겠지만, 국가의료의 왜곡 현상은 혼자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도 지역에서 외과 외길을 걸으며, 어려운 환경 속에 고군분투하는 필자 같은 외과의사는 환자들의 칭찬에 항상 목말라 있고 따뜻한 격려의 한마디에 힘과 용기를 가진다.
2014. 08. 19 국제신문 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