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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서] 암환자들에겐 하루가 소중한 선물
글쓴이 : 메디클럽 날짜 : 2015-03-17 (화) 13:40 조회 : 809


[권경아 동남권원자력의학원 혈액종양내과 과장]

나는 혈액종양내과 의사다. 다소 생소한 이름인 이곳 혈액종양내과에서 나는 다양한 상태의 암환자들을 만난다. 수술 후 보조 항암치료를 받기 위한 유방암, 대장암, 위암 환자들부터 치료해도 완치될 거라는 보장이 없는 전이성 암환자들까지. 그들이 처한 상황은 다르겠지만 마음만은 아마도 한결같을 것이다. '제발 내 병이 낫기를, 재발하지 않기를.'

유난히 병실 회진을 돌기 싫은 날이 있다. 어두운 소식을 전해야 하는 환자가 많은 날이다. 지금은 팔조차 들기 힘들지만 고전무용을 다시 하고 싶다는 단아하고도 꽃다운 유방암 환자, 숨이 차 산소 없이는 어디에도 갈 수 없지만 늘 씩씩함을 보이던 아줌마 폐암 환자…. 그들에게 안타깝지만 나빠졌다는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결국 에둘러 어렵사리 전한 후 환자와 가족들의 눈을 쳐다볼 수 없어 급히 병실을 나선다. 

짧지만 외래에서 웃음꽃이 피는 때도 간혹 있다. 그런 찰라의 순간이 일상의 무기력함과 슬픔, 분노를 컨트롤할 수 있게 해준다. 호지킨림프종으로 항암치료 후 완치돼 외래에서 추적 관찰 중인 한 환자는 치료 중에도 늘 밝은 모습이었는데 갈수록 날씬해지고 예뻐져 있다. 그는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해 너무 심심하다며 아이를 또 갖고 싶은 데 잘 안 된다며 나에게 더 늙기 전에 아이를 더 낳으라고 보챈다. 즐거움과 긍정의 마인드가 항암제 못지않은 약이 된 것 같다. 위암을 진단받고 수술 중 유방암·폐암을 추가로 진단받아 또 수술, 항암치료 후 그것도 모자라 만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표적치료제인 글리벡까지 먹고 있는 그녀는 남들은 하나 갖기도 쉽지 않은 큰 병을 네 개나 품고 있지만 언제나 소녀 같은 미소에 아줌마의 강인함까지 갖춰 씩씩하게 병마와 싸우고 있다. 다음 외래까지는 반 년이나 남았는데 그녀의 발랄함이 벌써 그립다.

내가 만일 암환자가 된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 아니, 내가 암환자가 되어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면 의사에게 무엇을 기대할지 생각해본다. 살려달라고, 힘들지 않게 해달라고, 살수 없다면 편안하게 죽게 도와달라고, 그것도 어렵다면 죽음이 나를 찾아와 데려가려는 순간 혼자이게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힘들지만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에게 지금 잘하고 있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격려해주고 싶다. 힘들지 않게 병원에 오고, 약 먹고 부작용이 생기지 않게 몸 상태를 잘 맞추며, 한 끼 한 끼 음식을 잘 챙겨 먹도록 노력하는 그들은 내가 모르는 많은 갈등과 고민이 있겠지만 겉으로는 덤덤하게 잘 지내려고 노력하며 오늘 하루가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삶으로 체험하고 있다. 나 또한 그들에게 마지막 동앗줄을 놓치게 하고 싶지 않다. 아쉽게도 우리의 의지와 달리 보다 일찍 세상과 작별하는 환자들에게 그들의 마지막은 결코 외롭거나 혼자이지 않았음을 꼭 전하고 싶다.


2015. 03. 17 국제신문 2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