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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서] 꽃을 드는 환자, 도장 찍는 의사
글쓴이 : 메디클럽 날짜 : 2015-03-31 (화) 09:52 조회 : 672


[곽현 아주재활병원장]

진료실 밖이 소란스럽다. 환자가 거세게 항의를 하고 있다. 최근 본원에선 접수, 병동, 외래, 면담, 치료실 등 환자들이 움직이는 곳마다 환자 확인을 위해 이름과 생년월일을 묻는다. 그러다 보니 성격 급한 한 환자가 '무슨 놈의 병원이 환자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매번 똑같은 질문을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최근 의료계의 화두 중 하나가 의료기관평가이다. 평가기관에서 일정 기준을 제시하고 이에 맞추도록 하는 일종의 강제적 성격이 강한 제도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환자 안전을 위한 정확한 환자 확인'이다. 

의료기관은 환자 확인에 대한 규정이 있어야 한다. 의약품 투여 전, 혈액제제 투여 전, 검사시행 전, 진료 전, 처치 및 시술 전에 반드시 환자를 확인해야 한다. 이런 시스템에 익숙치 않은 환자들에게는 번거로운 게 사실이다. 본원은 밴드, 이름표 등을 사용해 봤지만 가장 확실한 확인법은 이름과 생년월일을 묻은 것이다. 본원은 환자가 자신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먼저 얘기하도록 안내한다. '저는 1970년 4월 7일생인 곽현입니다'처럼 먼저 말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병원은 이것도 부족해 환자들이 꽃을 들고 다니게도 한다. 본원은 회진 대신 병실별로 면담을 매일 진행한다. 이때 꽃 색깔로 환자의 진료 내용을 구분한다. 오전에 간호사가 라운딩을 하면서 환자 침상에 색깔이 다른 꽃(일반 면담-노랑, 검사-파랑, 시술-초록)을 두고 오면 환자는 꽃 색깔에 따라 오늘 진료내용이 뭔지 확인하게 되고, 이를 통해 외래 간호사나 의사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성묘 가는 기분이라고 언짢아 하시는 분들도 지금은 다들 웃으면서 '오늘은 무슨 색이냐' '더 예쁜 색으로 달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도장도 찍는다. 본원은 타 재활병원과는 달리 처치 및 시술이 많다. 이때 시술 부위의 위치가 바뀌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스탬프를 이용한다. 의사가 면담 후 시술부위에 스탬프를 찍으면, 간호사가 다시 확인하여 찍고, 시술이나 처치 전에 이를 준비하는 간호사가 또 찍는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환자도 많았지만 많은 스탬프가 비슷한 부위에 찍혀있는 환자의 시술부위를 볼 때면 우리 스태프의 수고에 미소가 절로 나온다. 한 번은 허리 쪽 시술을 하는 환자가 허리 정중앙이 아프다고 한 모양이다. 친절하게도 우리 스태프는 원장인 내가 실수를 할까봐 허리 중앙에 스탬프로 조그만 하트를 만들어 놓았다. 나는 그 중앙에 큐피트 화살 같은 바늘로 시술을 하고….

최근 환자단체들은 의료진이 환자 확인과정을 거치든 거치지 않든 상관없이 환자가 자신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먼저 말하는 운동을 의료기관평가인증원, 보건복지부와 함께 전개, 투약 오류 예방에 환자가 참여하는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딱딱함보다는 꽃을 들고다니는 환자와 스탬프를 들고 다니는 의사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2015년 3월 31일 국제신문 2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