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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서] 슬기로운 의사생활과 나태주의 ‘풀꽃’
글쓴이 : 메디클럽 날짜 : 2020-12-22 (화) 09:08 조회 : 506


최보광 김용기내과 과장

올 상반기 한 케이블방송에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됐다. 대학병원 의사들의 생활을 소재로 한 드라마로, 주인공 의사들은 외모가 준수할 뿐만 아니라 의술도 출중하여 상태가 위중한 환자들의 수술도 곧잘 해냈다. 인품과 심성도 아름다워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장면도 적지 않았다. 일반 시청자들에게도 공감을 얻었는지 시청률도 꽤나 높았다. 시즌2도 현재 준비 중이라고 한다.

병원 생활, 특히 의사의 생활을 소재로 한 드라마는 흥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응급실, 수술실, 중환자실 등의 장소와 사연 많은 여러 가지 질병은 감동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내기에 더없이 좋다. 전문직 종사자가 많은 곳이라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소재도 아직 많다. 그래서 의학드라마는 대체로 꽤 극적이면서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중환자가 많고 진료과 간에 협력이 자주 필요한 대학병원과 달리 평범한 의사들이 겪는 일상은 드라마 속 그것과는 다소 괴리가 있다. 주변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의사 생활이 흥미롭고 극적인 경우보다는 반복적인 부분이 많고, 심지어 다소 무료하고 답답하다고 느끼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전체 의사 중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이는 극히 일부다. 대다수 의사의 일상은 매우 조용히 흘러간다. 좁은 진료실에 앉아 환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환자가 오면 호소하는 문제를 듣고 해결해준다. 전문 분야가 있는 경우엔 한정된 질환의 환자들이 오기 때문에 호소하는 문제도 거의 대동소이하다. 특히 개업의에게 이런 현상이 더 좁은 공간에서 일어나며, 통상 수십 년간 반복된다.

10여 년 전 대학병원 생활을 마치고 지금의 병원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당시에는 대학병원 생활에 약간 지쳐있어서인지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하고 주말에는 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허나, 몇개월이 못 돼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상당히 분주했던 대학병원 생활에 오랜 기간 적응해 있어서 오히려 평범한 일상에 적응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이런 감정은 많은 직장인도 느끼고 있고, 클리닉에서 일하는 대다수 의사가 더 자주 느끼고 있을 것 같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다. 이 짧은 시 구절에서 불현듯 답을 얻은 것도 같다.

의사로서 삶이 길어질수록 인생을 공유하는 환자 수도 늘어간다. 해가 갈수록 그분들을 만날 때 처음에는 이해하고 느끼지 못했던 부분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진료하는 질병도 마찬가지다. 같은 질병이라도 오래 진료할수록 점점 더 자세히 보인다. 오래 보고 자세히 알게 되면 애정도 생기게 된다. 매일 진료를 하다 보니 점점 더 느끼게 된다. 나보다 훨씬 오래 환자를 진료한 많은 선배의사도 이런 마음으로 묵묵히 진료실에서 인생을 살아 오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